에세이

가능성을 키우며 열심히 살자

엔트로피패러독스라는 이름에 담은 생각

엔트로피를 처음 배웠을 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줄어들지 않는다. 우주가 아주 긴 시간 끝에 열적 평형에 이르면, 더는 유용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흔히 우주의 열적 죽음이라 부르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열심히 살수록 그 끝을 앞당기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먹고 움직이고 일하면서 에너지를 쓴다. 집을 짓고, 컴퓨터를 만들고, 도시를 굴린다. 생명은 자기 안에 질서를 세우지만, 그 질서를 지키는 값으로 열과 엔트로피를 바깥에 흘려보낸다.

보통은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 엔트로피 증가는 삶이 치르는 비용이지 삶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

나는 그 관계를 한번 뒤집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비용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과정이, 어쩌면 생명이 여기 있는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일까

이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면 이상한 곳에 도착한다. 우주의 수명을 늘리려면 덜 움직이고 덜 만들어야 하며, 가능하면 생명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발렌타인과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가 비슷한 계산을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전체를 오래 유지하려면 사람을 덜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인간을 없애야 한다니, 계산 어딘가가 틀렸다. 생명은 자원을 소비하지만, 새로운 자원을 찾고 문제를 풀고 다음 가능성을 만드는 주체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하루 더 부지런히 산다고 우주의 수명이 잴 수 있을 만큼 줄어들지는 않는다. 개인의 하루와 우주의 시간은 나란히 놓고 견줄 크기가 아니다. 정작 나를 오래 붙든 것은 우주론의 정답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끝을 지키겠다고, 지금 여기 있는 생명을 줄여야 하는가.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우리가 엔트로피 증가를 막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면. 오히려 그 과정에 참여하려고 여기 있는 것이라면.

질서는 소산 속에서 태어난다

생명은 음식과 산소, 빛에서 자유에너지를 얻어 자기 조직을 유지하고, 열과 대사산물을 환경으로 돌려보낸다. 자기 안의 질서를 지키는 동안 더 큰 계의 엔트로피는 늘어난다.

프리고진이 연구한 소산구조는 흐름과 소산1 속에서 질서가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흐름이 멈추면 그 질서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니 어떤 질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피해 숨어 있는 예외가 아니다. 에너지가 흘러가고 흩어지는 바로 그 과정에서 피어난다.

생명도 무질서로 기우는 우주 안에서 쉬지 않고 질서를 짓는다. 아름다움을 찾고, 지식을 쌓고, 기술을 밀어올린다. 그리고 그 모든 만듦은 다시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에 얹힌다. 질서와 무질서는 맞붙어 싸우는 두 힘이라기보다 한 과정의 안과 밖에 가깝다.

여기서부터는 물리학을 넘어선 내 생각이다. 엔트로피 증가는 생명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비용이면서, 어쩌면 생명이 우주에서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리학이 증명한 결론은 아니다. 물리적 사실에서 출발해 내가 세워본 가설이다.

네트로피

이런 생명의 성질을 나는 네트로피라고 부른다. 물리학의 표준 용어가 아니라 내가 붙인 이름이다.

네트로피는 단순히 잘 정돈된 상태가 아니다. 스스로 살아남고 배우면서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만드는 생명과 그 힘을 뜻한다. 사람도 네트로피다. 사람이 쌓은 지식과 문화, 기술과 관계도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네트로피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은 자신과 다른 생명을 지키고 키우면서, 더 많은 질서와 가능성을 만드는 방식으로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에 참여한다.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반론이 있다. 엔트로피를 늘리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면, 불을 지르고 핵폭탄을 터뜨리는 편이 훨씬 빠르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파괴도 엔트로피를 빠르게 늘린다. 하지만 동시에 네트로피를 없앤다. 생명과 생태계가 사라지고, 지식과 문화와 관계가 무너진다. 그 생명들이 앞으로 만들 수 있었던 미래도 함께 사라진다.

핵폭발은 엔트로피의 폭증이지만 네트로피의 붕괴다.

그래서 당장 엔트로피를 많이 늘리는 것이 답은 아니다. 파괴는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흩어버리고, 그 대신 긴 미래를 없앤다. 교육과 개발, 과학기술과 돌봄은 생명이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많은 것을 만들게 한다.

효율적으로 열심히 산다는 것

이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허무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속세로 돌아와 개발하고 일하고 싶어졌다.

기술을 발전시키고, 제품을 만들고, 풀리지 않던 문제를 푼다. 교육은 이미 태어난 네트로피가 더 많이 이해하고 선택하고 만들게 돕는다. 돌봄과 의료는 생명을 지키고, 그 생명이 계속 살아가며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나를 더 빨리 태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돈을 벌자고 나를 망가뜨리면 내가 앞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까지 함께 사라진다. 남을 착취하는 것도 같은 이유로 옳지 않다. 내가 말하는 효율은 오늘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생명이 오래 살아가며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범죄와 폭력은 다른 생명뿐 아니라, 그 생명이 만들 수 있었던 미래까지 없애버린다. 타노스는 자원 소비를 줄이려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사람부터 없앴다.

가치도 계산할 수 있을까

이 철학이 멋있는 비유로만 끝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거친 가설이다.

볼츠만은 엔트로피를 $S = k_B \ln \Omega$로 적었다. $\Omega$는 같은 거시상태를 만들 수 있는 물리적 미시상태의 수다. 물론 이것을 인간에게 가치 있는 미래의 수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이 식은 내게 질문 하나를 남겼다.

좋은 선택이란, 나와 다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미래를 늘리는 일이 아닐까.

교육과 기술은 고를 수 있는 미래를 늘린다. 폭력과 자기 파괴는 그것을 줄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도덕과 종교의 문제로만 여겼던 판단 중 일부도 언젠가는 계산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행동이 에너지를 얼마나 쓰는지, 되돌리기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의 선택지를 늘리고 누구의 선택지를 줄이는지 비교해보는 것이다.

물론 물리학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해주지는 않는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는 우리가 정해야 한다. 다만 어떤 행동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더 잘 지키고 키우는지는 점점 더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공식은 없다. 지금은 앞으로 연구하고 검증해보고 싶은 가설이다.

엔트로피패러독스

2020년 7월 11일, 나는 회사의 이름을 엔트로피패러독스라고 지었다.

회사를 세운 과정과 그 뒤의 이야기는 따로 쓰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그 이름에 담긴 내 생각만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무질서로 기우는 우주 안에서 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열심히 만들수록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에도 그만큼 참여한다. 나는 이 역설을 죄책감으로 안고 가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니까.

우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줄여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개발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되도록 잘 쓰려 한다. 나와 다른 생명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겠다.

가능성을 키우며 열심히 살자.


  1. 소산(消散, dissipation):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열 등의 형태로 주변에 퍼져, 다시 유용한 일로 쓰기 어려워지는 과정.